광주의 유래와 연혁

마한시대
광주지방에 국가단위 사회가 발생한 시기는 마한시대로 추측된다. 魏誌東夷傳韓條에 의하면 마한지역 중 광주와 관련하여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과 불미지국(不彌支國)을 들 수 있는데 구사오단국은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불미지국은 나주일대로 보고 있다.
불미지국의 경우 나주의 반남ㆍ덕산ㆍ대안ㆍ신촌에 소재한 30여기의 고분군으로 보아 나주일대로 추정이 가능하나 구사오단국의 경우 반남 등지에서 고분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마한의 성장기반인 선사시대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지 않아 추정에 무리가 있다.
따라서 구사오단국의 지역을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우치동ㆍ송암동ㆍ서창동 등 극락강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광주가 속한 구사오단국은 극락강 대촌 주변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한시대 각국의 인구수는 약 5천~1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상한년대는 지석묘중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로 보아 서력 기원전후가 되며 하한년대는 백제의 근초고왕때 마한 잔여세력을 토벌한 것으로 보아 AD 4세기 후반이 된다. 따라서 마한은 기원전후에서 4세기 후반까지 4ㆍ5백년간 지속된 것으로 본다.
백제시대
백제는 고조선이 망한 후에 남하하여 온 유이민 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점차 주변 부족국들을 통합하면서 그 세력을 확장한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 百濟國에서 일어난 삼국의 하나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백제의 군현은 모두 147개소라 하고 있다. 전남지역의 군현은 중ㆍ동ㆍ남ㆍ서ㆍ북 오방의 하나인 남장 久和下城(장성ㆍ구례의 二說)에 속하였는데 이 무렵의 광주지역은 武珍州이며 직할 3현인 未冬夫里縣(남평), 복룡현(나주일대), 굴지현(창평)을 통치하였으며 전남지역에는 13군 42현이 있었다.
당시 백제의 해상세력을 형성한 중요한 거점이 된 武珍(광주), 發羅(나주), 月奈(영암)는 지정학상으로 볼 때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류를 쉽게 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라는 점에서 武珍은 문물교역의 요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군현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것은 경덕왕 16년(754)의 일이며 이 때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었다. 양주에 금해경, 한주에 중원경, 삭주에 북원경, 웅주에 서원경, 전주에 남원경의 5경을 두었고 이 당시 전남지역은 남원경에 속한 武州이며 15군 32현을 관할하였다.
광주가 武州라고 기록된 것은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병하여 웅주, 전주, 무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경계 및 신라의 옛땅을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삼국사기 무진주조에 기록이 보이며 신라 신문왕 6년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지방조직의 핵을 이룬 9주를 살펴보면 상주, 양주, 강주, 한주, 삭주, 웅주, 연주, 전주, 무주로서 군현제는 피라미드형의 체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혜공왕 12년에는 경덕왕 때에 개칭된 관제가 다시 옛날처럼 복구되어 지방군현의 명칭 역시 다시 복구되었을 법 하지만 기록이 없고, 다만 신라후기에 무주ㆍ무진주로 부른 예가 있고 보면 혜공왕 이후에는 무주가 다시 무진주로 호칭되었거나 아니면 함께 부르게 되었던 듯 하다.
무주는 근처 3현인 현웅현(남평), 용산현(나주일부), 기양현(창평)을 직할한 전남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이 당시 최소의 지방행정구역은 촌이었으므로 무주에도 몇 개의 촌이 있었을 것이다. 촌은 대략 10호가량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통일신라는 군사조직으로 도성을 호위하는 侍衛府와 9誓당의 중앙군 이외에도 5州誓 및 三邊守, 그리고 지방군을 두었다.
十停이 바로 지방군을 뜻하며 停은 군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각 지방요지에 설치한 지방군단이었다. 그 십정중의 하나가 未多夫里停이고 무주에 직속되었던 玄雄縣(남평)에 있었으며 군단의 표지는 黑色衿이었다. 한편 무주의 전신은 未多夫里停이 아니었나 하는 추론도 있다.
후삼국시대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서남해안의 防守婢將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6년에 무진주를 점거하고 부근 군현을 빼앗아 완산주(전주)에 진군하여 도읍을 삼고 후백제왕이라 칭했다.
그때 북방의 궁예도 강원도의 대부분을 정벌하고 도읍을 松岳(개성)으로 옮긴 뒤 경기도를 정복, 혜공왕 5년에 후고구려왕을 자칭하였다. 궁예는 칭왕이후 3년에 국호를 마진이라 하다 다시 태봉으로 고쳤다. 또 당시 궁예에 투항하였던 왕건은 상주 등 30여 주현 및 충남 공주를 평정하여 궁예에 귀부 시키고, 해상을 통해 후백제 견훤을 공격하여 금성군(나주) 등 10여군을 공략한후 나주에 진을 쳤다. 신라를 두고 후백제와 태봉(마진)이 광주와 나주를 경계로 그 霸를 겨루었다.
고려시대
고려태조 19년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였으며 태조 23년(940년)에 武州를 光州로 개편하고 동시에 도독부를 두었다.
그후 성종 14년에 관제개혁이 있었는데 전국을 3경ㆍ4도호부ㆍ10도로 나누는 동시에 12주목을 12주절도사로 변경하였고 이 개혁으로 전라남도를 해양도라 했으며 도호부를 안남(현재 영암)에 설치하였고 광주에는 刺史를 두었다. 당시 해양도에는 1도호부에 14주 62현이 있었는데 전주ㆍ승주에서는 절도사가 있었고, 자사를 둔 곳은 담주(담양)ㆍ패주(보성), 광주의 3주였다.
그러다가 현종 9년에 다시 행정구역을 재현하여 諸道의 안무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4대 도호부ㆍ8목ㆍ56지주군사ㆍ28진장ㆍ20현령을 두었다. 이때 광주는 강등되어 해양현이 되었다. 연대는 미상이나 그후 주로 승격되었다가 26대 충선왕 2년에 다시 강등되어 화평부가 되었는데, 그 까닭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당시 광주에는 토호의 세가 강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취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그 후 공민왕 11년에 다시 이름을 바꿔 茂珍府라 했다.
조선시대
전라도에는 좌도ㆍ우도가 있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해 있었다. 세종 12년 邑人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하였다는 죄과로 牧을 강등하여 무진군이라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문종 원년에 다시 복칭되었다가 성종 20년 광산현으로 강등되고 연산군 7년에 복구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인조 숙종대에도 이와 비슷하게 불미스러운 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는 사례가 있었다.
일제 탄압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지방제도에 따라 광주에 읍장을 두었는데, 그 당시의 광주는 성벽안을 성내면이라 했고 성외에 기례방ㆍ공수방ㆍ부동방의 3방이 있었기 때문에 1면 3방을 합병하여 광주면이라 호칭하였다.
1931년 4월 1일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광주읍으로 승격시켰다가 1935년에는 다시 府政을 실시 광주부로 고쳤다. 이때 행정구역은 41개 정으로 확장되었다.
대한민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하자 주둔 미군에 의한 군정이 2년 11개월동안 실시되다 1947년 6월 3일부로 군정청이 폐지되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광주부는 1949년 광주시로 바뀌면서 두차례의 행정구역 변경이 있은 뒤, 1963년에는 서창ㆍ대촌출장소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시 관할 구역은 214.92㎢로 좁아지고 6개 출장소와 45개 동이 되었다.
1966년에는 계림1구ㆍ월산동ㆍ효죽동의 3개동을 분동하여 48개동으로 늘렸고, 1970년 다시 산수2동ㆍ서석2동ㆍ학3동 등 10개동을 분동하여 모두 58개동이 되었으며 당시 광주 인구는 502천명이었다. 1973년 7월 1일부터 종래의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석곡ㆍ지산의 2개 출장소만 존치시키는 한편 동구와 서구로 나누어 區制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1980년 4월 1일 석곡ㆍ지산 2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북구를 신설하여 3개구로 운영하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부산ㆍ대구ㆍ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이때만 해도 3구 72동으로 행정구역 면적은 215.11㎢에 불과했으나 1988년 1월 1일 법률 제3963호 공포로 송정시와 광산군 전역이 다시 광주직할시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은 501.44㎢로 크게 늘어나고 4구 83동 9출장소를 관할하는 서남권 중추관리기능도시로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5년 3월 1일 서구에서 남구가 분구 되었고 2010년말 현재 5개 자치구에 95개 행정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광주는 UN지정 인권도시 추진을 통해 세계적인 민주ㆍ인권ㆍ평화도시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적극 노력하고 있으며 2007년도에 광역시중 세 번째로 수출 100억불 도시를 달성한 이후 2014년에는 수출 162억불을 달성하고 2015년도에는 165억불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등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2011년 11월까지 전국 최초로 4개 권역에 문화산업 투자진흥지구가 지정되고 2011년 1월에는 9개 지구에 광주연구개발(R&D) 특구가 지정되면서 미래성장동력 기반을 확충하였고 새로운 일자리 10만개 창출과 자동차ㆍ광ㆍ가전ㆍ그린에너지ㆍ금형산업 등 5대 주력산업을 중점 육성하는 등 우리시의 소중한 자산이자 장점인 「민주ㆍ인권, 문화예술, 첨단산업」 3각축으로 한「더불어 사는 광주, 더불어 행복한 시민」도시 건설을 위해 광주가 새롭게 비상하고 있다.
시민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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