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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역사의 이해

삼한 및 삼국시대의 광주
광주지역에 국가 단위의 사회가 등장한 시기는 삼국시대일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의 기록과 출토된 유물 등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마한지역 중 광주와 관련된 마한 내의 소국은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의 근초고왕 대에 와서는 광주지역에 터를 잡았던 마한 세력이 완전히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행정구역 단위로서 광주가 역사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백제 동성왕20년(498년) 때의 일이다. 백제시대 광주는 무진주라 불렸고, 호남 지역 및 제주도 지역의 조공을 거두어들이는 경로로서 유력한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다.
고려 및 조선시대의 광주
통일신라가 쇠퇴할 무렵 견훤은 무진주를 중심으로 후백제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무진주는 후백제의 전략적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고려의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기존 무주 혹은 무진주라 불리던 이 지역은 ‘광주’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하여, 고려 태조 23년(940년)에는 광주가 공식적인 명칭으로 확정된다. 이후 여러 차례의 행정변화를 겪었지만, ‘광주’라는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을 보인다. 조선 건국 이후 광주는 목급(牧級)의 도시로서 농업지대에 위치한 큰 읍으로 존재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그리 중요한 역하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광주는 전남지방의 한 중심 도시로서 성장해 왔지만, 나주의 역할에 비해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못하였고, 또 이 지역 출신 인사가 중앙 정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경우도 드물었다. 다만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고경명과 김덕령 등 이 지역 출신의 의병활동이 두드려졌던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전라도 지역이 온전하게 보전됨으로써, 식량의 산출 및 이순신 수군 활동의 기지로서 역할을 담당해 궁극적으로 국난 타개의 견인차 노릇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감정기의 광주
1895년 고종은 지방체제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전라도가 나주부·전주부·남원부 3부로 분할되자 광주는 나주부 예하에 속하게 되있으며, 이때 광주군으로 개편되었다. 다시 1896년 정부가 아관파천을 단행한 후 8월 4일자(칙령36호 1조)로 지방체제를 개혁하여 새로 13도제를 실시하며 각도에 관찰사를 두는 체제를 만들었는데, 전라도를 이때 전라남·북도로 분리함으로써 ‘전라남도’라는 행정구역이 정해지게 되었다. 이때 남도의 관찰부는 광주에 두어 1896년에 광주는 전라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된다. 이후 광주는 전라남도의 수부(首府)로서 행정의 중심지는 물론이고 사법과 통신, 교육,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있다. 전남재판소가 옮겨오고 지방 공립소학교가 설치되었으며, 나주우체사가 광주로 이전해 왔다. 1907년에는 금융조합이 처음으로 광주에 설치되어 전국으로 파급되기도 하였다.
한편 1895(고종 32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의 의도를 드러내자, 이에 맞서 국권을 지키려는 의병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의병투쟁에서 전라도 지역은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1895년 제1차 의병투쟁에서는 장성의 유생 중심 의병과 나주의 이서(吏胥)중심 의병들이 활동이 있었고, 1905년 제 2차 의병투쟁은 태인에서 기의한 최익현과 임병찬이 중심이었는데, 이들은 태인과 정읍, 순창, 곡성 ,장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3차 의병은 1907~1909년 사이에 활동하였는데, 기삼연과 양회일 그리고 심남일 등이 지역별 의병부대를 이끌었고 이들 의병부대에 수많은 의병들이 참여하였다. 이 시기 광주 출신이거나 광주에서 활동한 저명한 의병장으로 김준(김태원)과 김율 형제, 김영엽, 양진여와 양상기부자, 김동수, 김원국, 김원범 형제, 강사문, 조경환, 신덕균 등이 있었다.
1912년경 일제는 시가를 정비하고 도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동헌과 광산관 등 광주의 옛 관아건물을 차례로 철가하고 시가지에 일본식 건물을 건축하였다. 성벽과 누문이 헐린 뒤 동서로 도로를 뚫어 시가구획을 정비해 나갔는데, 그중에서도 본정통(本通통) 거리는 일본인 점포가 즐비하고 광주우체국 등 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광주의 상업중심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철도교통과 관련해서는 1914년에 호남선이 목포에서 개통되었고, 광주~송정 간 선로는 1922년에 개통되었다. 광주~담양선도 1922년 12월에 운행을 개시하였고, 광주~여수 간은 1928년에 시작하여 1930년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광주지역에서는 근대적 교육기관이 차례로 설립되고, 교육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이 고취됨으로써 광주는 전남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시에는 김철과 최한영 등의 주도하에 3월 10일 만세시위를 벌였고, 1929년 11월에는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학생만세시위를 일으켜 전국으로 파급시켰다. 이 밖에도 1929년 신간회 광주지회의 활동, 독서회의 활동 등은 광주지역의 민족항쟁 중심지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현대의 광주
광복 이후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빠르게 진행된 정부 수립과정 속에서 부정적인 정권 승계의 모습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럴 때마다 광주는 민주주의 사수를 위한 선봉장 역할을 빈번이 맡게 된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일 민주당원들의 소규모 시위 이후 4월 18일 서울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광주의 시위 열기는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4월 19일부터 광주고교를 비롯한 고교생들의 규탄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광주지역의 4월 민주혁명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고 71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였다. 3·15 부정선거에서 비롯된 4·19민주혁명은 국민의 힘에 의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개가를 올렸다. 우리 국민들의 민주역량을 과시하는 숭고한 역사를 정립한 것이다. 하지만 4·19 민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른바 ‘10·26사건’)으로 18년간 유지해 온 유신정권이 마무리되는 듯 하였으나, 곧이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같은 해 ‘12·12사태’라 일컫는 군사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인 1980년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노동 3권 보장 등을 내세운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고,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광주 역시 신군부의 권력 장악 음모와 민주 인사 및 학생 운동 지도부의 검거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는 공동 명의로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 만약 휴교령을 내리면 온몸으로 거부할 것, 양심 있는 교수들은 적극 동참할 것 등을 호소하였다. 5월 13일에는 전남대학교 교수협의회의 시국선언이 발표되었고 일부 고등학생들의 시위도 일어났다. 계엄확대 이후 계엄군과 학생들의 첫 충돌은 5월 18일 전남대학교에서 일어났다.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차별하게 구타하였는데, 학생 10여 명이 그 자리에서 부상을 입고 쫓겨났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다시 광주역 광장에 모여 대열을 가다듬고 비상계엄 해제와 김대중 석방, 휴교령 철회, 전두환 퇴진, 계엄군 철수 등을 외치며 도청을 향해 시위를 시작하였다. 계엄령 확대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이 봉기한 지역은 전국에서 오로지 광주뿐이었다. 광주 외곽을 완전히 봉쇄한 계엄군은 신군부가 수립한 ‘상무충정작전’에 따라 진압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항쟁지도부가 있는 전남도청 진압에 중무장한 3공수여단 11대대를 투입시켰다. 5월 27일 0시 정각 도청 상황실의 전화가 끊기고 계엄군의 공격에 시민군은 무참히 진압당하고 말았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진행된 5월 항쟁은 좌절되었지만, 결코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정신이 계승되어 이후의 국내외를 막론한 민주주의 수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의 결과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시민 만족도 조사
시민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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