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지방행정체계의 변화

삼국시대 마한의 광주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마한의 지역 중 광주와 관련이 있는 지역은 마한 내 소국의 하나인 ‘구사오단국’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집단의 위치에 대하여 몇몇 학자들이 위치 비정을 시도한 바 있는데, 최몽용은 광주의 중심지인 대촌천, 지석천, 극락강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백제의 세력 강화에 밀려 남천한 마한은 중심부를 공주 이남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광주 지역과 크게 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시대 백제의 광주
광주지역이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때는 4세기 근초고왕(346~375년) 때였을 것이다. 근초고왕이 전남지방을 경략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반(半)설화적 형태로 나타나 있다. 백제는 지방을 중·동·서·남·북 5방으로 나누고 중방을 고사성, 동방을 후안성, 서방을 도선성, 남방을 구지하성, 북방을 웅진성이라 칭하였다. 각 방 아래 군현을 두어 통치하였는데, 전남지방은 남방성(南方城)과 구지하성(久知下城)에 속하였다. 이 무렵의 광주지역은 무진주로서 직할 3현인 미동부리현(남평), 복룡현(나주일대), 굴지현(창평)을 통치하였으며, 전남지역에는 13군 42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광주
삼국통일 전쟁을 완수한 신라는 문무왕 대부터 신문왕 대에 걸쳐 군현의 행정조직을 정비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게 되는데, 광주지역은 9주 중 무진주(武珍州)에 속하였다. 경덕왕 16년(757년)에 무진주가 무주(武州)로 개칭된다. 이는 왕권 전제화를 꾀하기 위한 관호와 지명의 한자화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편에도 불구하고 무진주와 무주가 계속 혼용되다가, 결국 혜공왕 12년(776년)에 관제 복구와 함께 무진주 지명 또한 빈번히 사용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광주
고려의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무주 혹은 무진주라 불리던 이 지역의 지명은 ‘광주’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무주의 읍호를 광주(光州)로 개칭하고 도독부를 설치한다. 이후 성종 14년에 관제개혁을 통해 10도제를 실시하게 되면서 전남지방을 해양도라 칭하고 광주에 자사를 두었다. 한편 현종 9년에 광주는 강등되어 해양현(海陽縣)이 되고 현령관이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고종 46년(1259년) 공신 김인준의 외향으로 광주는 광주목(光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강등되어 충선왕 2년(1310년)에는 화평부(化平府)라 불리게 된다. 공민왕 11년(1362년)에 광주는 무진부(茂珍府)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때 이름이 옛날의 무(武)자에서 무(茂)자를 쓰도록 바뀐 것은 고려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하여 고친 것이었다. 그리고 공민왕 22년(1373년)에 광주목(光州牧)으로 다시 한 번 지명이 변경되었다. 읍호가 바뀔 때마다 행정 단위에 변화가 있었고 그때마다 외관의 지위 또한 현령, 지주사, 부사, 목사 등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의 광주
조선시대 태조 2년(1392년)에 광주는 광주목이라 불리며 전라도의 계수관이 두어졌다. 차츰 왕조의 기반이 안정되고 왕권이 확립됨에 따라 제도의 개편이 있게 되는데, 세종 12년(1430년)에 무진군으로 강등, 계수관이 장흥부로 옮겨졌다가 문종 원년(1451년)에 광주목으로 복구되었다. 그 후 광주는 성종 20년(1489년)에 광산현으로 강등, 연 산국 7년(1501년)에 광주목으로 승격, 인조 2년(1624년)에 광산현으로 강등, 인조 12년(1634년)에 광주목으로 승격, 숙종 27년(1701년) 광산현, 영조 33년(1757년) 광주목, 고종 6년(1869년) 광산현, 고종 8년(1871년) 광주목 등으로의 변화가 있었다. 태종 때부터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전라도 57관이 완성되는데, 이 57관은 읍호의 승강이나 소속의 변경 등은 없지 않았으나 정유재란의 피해로 인하여 선조 33년(1600년) 진원현이 장성군으로 편입된 것을 제외하고는 커다란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광주는 고려 말에 불리던 광주목이란 읍호 그대로 조선조에 들어와 나주목과 함께 계수관이 두어졌다. 계수관이란 도의 지시를 소령의 군현에 전달하면서 군현을 통할하던 기구였다. 고려 말 전라도의 계수관은 전주와 광주, 승주, 익주였는데, 조선 태조 2년(1392년)에 승주와 익주가 제외되고 완산(전주)과 나주, 광주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읍리 민의 수령에 대한 행패나 모반·강상죄 등을 범하면 그 고을 자체를 없애버리거나 강등 또는 인근 군현에 병합시키기도 하였다. 광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외관의 승강이 반복되었고 읍호도 ‘광주→무진→광산→광주’로 적잖은 변화를 겪기도 하였지만, 조선시대 오랜 기간 동안 ‘광주’라는 고을의 명칭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근대 이후의 광주
갑오개혁 이후
1895년 갑오개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적 행정편제의 개편이 이루어진다. 1895년 8도의 지방관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의 행정구역으로 바뀌면서, 광주는 나주부 예하의 광주군이 되었다. 1896년에 13도제가 실시되고 그에 따라 광주는 전라남도의 1등 군으로서 지방장관의 치소인 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1914년에는 대폭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되는데, 41개 면 432개 동리에서 15개 면 152개 리로 대폭적인 통폐합이 이루어져 광주군은 읍성을 중심으로 광주면을 포함하여 15개 면 152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7년 광주면은 면제 시행령에 의하여 지정면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1931년에는 읍면제 실시에 따라 광주면은 읍으로 승격하게 된다. 1935년에는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면서 지한면의 4개 리(태봉·서남·주곡·홍연), 효천면의 5개 리(풍향·장호·동계·중흥·신안) 등 14개 리를 편입하여 33개 정(町)이 41개 정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이때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광복 이후
1946년 일제의 잔영을 없애기 위한 잠정적 조치로 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채 41개 정을 47개 동으로 고쳤으나 부의 명칭은 그대로 존속된다. 1949년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광주부는 광주시로 개칭되었다. 1955년 광산군 서방면·극락면·효지면 전 지역과 석곡면의 5개 리(화암·청풍·망월·장등·운정)가 광주시에 편입되어 광주시는 종전의 41개 동과 편입한 39개 동을 합하여 80개 동이 되었다. 1957년에는 광산군의 대촌면·지산면·서창면(송대리 제외)과 담양군 남면의 덕의리·충효리·금곡리가 광주시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는 시 중심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창출장소(서호·방하·신호동) 및 대촌출장소(송석·등룡·학승동) 관내 구역이 광산군으로 환원되면서 시역은 다시 좁아져 6개 출장소와 45개 동이 되었다. 1973년에는 중부·동부·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동구(54개 동)를 설치하고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45개 동)를 설치하여, 광주시는 2개 구 99개 법정동 58개 운영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1980년에는 동구 관할의 중흥 1·2동과 석곡출장소(8개 동), 서구 관할의 3개 동과 유동·누문동·북동·임동·동운동·태봉동을 통합하여 북구를 설치하고, 동구 관할의 양림동·방림 1·2동을 서구로 편입하여 3개 구, 99개 법정동, 58개 운영동을 관할하였다. 1986년에 광주시는 광주직할시로 승격되고 광산군 송정읍은 송정시로 승격된다. 1988년에 광산군과 송정시가 광주직할시에 편입되어 동구·서구·북구에 이어 광산구가 신설됨에 따라 4개 구와 201개 법정동 그리고 80개 운영(행정)동 및 9개 출장소를 관할하게 되었으며, 1995년에는 광주광역시로 개칭되면서 5개 구, 92개 동(201개 법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시민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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