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소장 문화재

정지장군 갑옷(鄭地將軍 甲衣)
고려말 장군으로 왜구 격퇴에 많은 공을 세운 정지(1347~1391)장군의 갑옷으로 보물 제336호이다. 『고려사』에는 왜구를 치러 가던 정지 장군이 지리산 신사에서 승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철판과 수많은 철제 고리를 엮어 만든 특이한 형태의 이 갑옷은 왜구를 물리칠 때 직접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형으로 된 여러 장의 철편을 쇠고리로 연결하여 상반신을 화살과 창검으로 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든 삼의이며 전복 밑에 받쳐 입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깨와 팔은 고리만으로 연결해서 팔놀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철편의 크기는 가로 5∼8.5cm, 세로 7.5∼8cm가량이며 두께는 약 2㎜정도이다.

전라남도 도청회의실 신축설계도(全羅南道道廳會議室新築設計圖)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이 설계도는 1930년경에 전라남도 회의실을 신축하기 위해 한국인 건축가 김순하가 작성한 것이다. 이 도면은 얇은 천에 양면에 무엇인가를 입힌 듯한 불투명한 재료 위에 가는 필과 먹으로 그린 것이라 짐작된다.
현재 두 번째 도면이 빠지고, 제1호부터 제9호 도면까지 남아있는데 전체 매수는 알 수 없다. 제1호에 그려진 정면도, 입면도, 평면도 등은 축척을 백분지일로 하였고 각 부분의 상세도는 이십분지일로 작성하였는데 상세도에서는 재료, 크기 등을 자세히 글씨로 써넣었으며 철근 배근도도 포함되어 있다. 도면에 사용된 길이의 단위는 척(尺)을 사용하여 당시 건축설계도에서 미터법이 적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진김해김씨가상여(康津金海金氏家喪輿)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이 상여는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의 김현장이 3대 째 사용해 왔던 것을 1971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상여란 초상 때 시신을 장지로 운반하는 제구를 말한다. 보통 민간에서는 상여집에 보관해 둔 마을 상여를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사용했다. 그러나 이 상여는 강진의 부호인 김제진이 부친의 장례에 사용하기 위해 1923년에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전통적인 상여와는 달리 2층으로 되었으며 목조기와집 형태로 상여 전후에는 각 1개씩의 용두판이 있는데 한쪽은 청룡이 다른 한쪽은 황룡이 새겨져 있어 남녀에 관계없이 이 상여를 쓸 수 있게 하였다. 팔작기와지붕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웅장한 크기, 정교하게 아로새긴 창살과 용두판 그리고 호화롭게 치장된 대봉유소 등은 상여 주인의 부를 과시하는 듯 하다.

분청사기 전라도명 항아리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인 분청사기 전라도명 항아리는 전라도명이 음각된 분청사기조화모란문호(粉靑沙器彫花牧丹文壺)이다. 광주 충효동 도요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어깨에는 연판문을 새겼다.
지방명이 기록된 대부분의 분청사기는 경상도에 치중되어 있을 뿐, 전라도 지방에서는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아 현존하는 분청사기로는 이 지방의 특색을 추정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분청사기 전라도명 항아리는 이 지방이 조화와 박지 분청사기의 산지로서 막연하게 추정되어 왔던 것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광산노씨 분묘출토 명기류(光山盧氏 墳墓出土 明器類)
광산노씨의 분묘는 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 속칭 ‘지내골'에 위치하고 있었다. 1987년 후손들이 분묘를 이장하던 중 노우섭씨 16·17·18대조의 분묘에서 백자 명기를 비롯하여 남녀 도우, 백자 마형기, 술띠, 유리구슬 등 36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도우는 남녀 각 3점으로 철화백자로 표정만 다를 뿐 크기는 거의 같으며 양팔은 한데 모아 가슴에 올리고 있으며 눈과 눈썹, 머리털, 손부분에 철화를 하였다. 말안장이 표현된 마형기는 2점으로 눈, 갈기, 재갈부분을 철화로 표현하였다.
피장자의 생몰연대를 확인할 수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및 연산군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들 명기류는 이 지역에서는 출토 예가 매우 적으며 조선 초기 부장품과 백자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김봉선유품(金鳳善遺品)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호인 이 유품은 대한제국시대에 활약하였던 김봉선(1856~1909)이 남긴 고문서와 대례복 등 53점이다. 김봉선은 전북 남원 출신으로 농상공부 참서관, 궁내부 비서관, 경리원기사 등을 역임하면서 고종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상소문을 올려 울분을 토하였는데 그 내용이 고품초(告稟草)에 실려 있다.
고문서에는 고품서 외에 고종의 밀명이 담긴 어찰과 교지, 칙명, 교첩, 시권, 통문, 간찰, 이력서, 증서 등 48점이 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대례복은 하의는 없어져 상의와 패도, 대례모가 있으며 그 밖에 호패, 인장이 있다.

눌재집 목판각(訥齎集 木版刻)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인 눌재집 목판각은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인인 눌재 박상(1474∼1530)의 시문집 판각이다. 박상의 본관은 충주로 연산군 7년(1501)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를 시작으로 중종 24년(1529) 나주목사를 마치기까지 약 29년간 관직에 있었다.
목판각은 원집 7권, 속집 5권으로 총 12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간행된 것은 명종 2년(1547) 금산수령 임억령이 유고집을 발행했으며, 다시 숙종 20년 (1694) 김수항이 빠진 것을 원집에 합쳐서 정리하고 판각하였다. 헌종 7년(1841)에 재변(災變)이 있어 광주목사 조철영이 다시금 글자를 새기고 이어 누락된 것을 다시 수습하여 총 18편이 되었다.

장흥임씨묘출토복식(長興任氏墓出土服飾)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김덕령(1567∼1596)장군의 조카며느리인 장흥임씨묘 출토복식이다. 장흥임씨의 생존시기가 김덕령 장군과 같은 시대로 기록됨에 따라 이 의복의 착용연대도 1590년대로 추정된다. 이 의복은 1971년 6월에 이장을 하던 중 목곽과 목관 속에 유골과 함께 매장되어 있던 것이 출토된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의 염습과정과 장례풍습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수의용품으로서 유물중 철릭은 임진왜란 전에는 여자들도 철릭을 착용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으며, 목판깃과 반달깃 저고리가 함께 출토됨에 따라 서로 다른 깃이 같은 시대 존재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출토복식 23점 중 상하의와 내복 등 6점이 1980년 국가민속문화재 제 112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추가지정조사결과 머리싸개, 멱목, 소매, 교포, 솜이불, 솜버선, 미투리 등 수의용품 17점이 추가로 지정되었다.

사암집 목판각(思庵集 木版刻)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인 사암집 목판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사암 박순(1523~1589)의 문집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박순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충주이다. 명종 8년(155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관 전적을 시작으로 선조 12년(1579) 영의정을 거쳐 선조 20년(1587)까지 35년간 관직에 있었다.
인조 26년(1648)에 박순의 자손들에 의하여 7권 3책으로 편집, 간행되었다. 그 후 철종 8년(1857) 다시 중간본이 발행되었다. 이 책의 권1∼3에는 시 583수, 권4에 계 2편, 서 2편, 잡서 4편, 비명 7편이고, 권5∼7은 부록으로 행장, 축문, 제문, 신도비명, 상소, 시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오랫동안 조정에 있었던 박순의 경륜을 정리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자료이다.

고운묘출토유물(高雲墓出土遺物)
국가민속문화재 제239호인 하천 고운의 묘에서 출토된 복식유물이다. 고운은 조선 중기의 문장가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과 의령현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조부이다. 1986년 9월 묘 합장을 하기 위해 이장을 하던 중 내관 속에서 시신과 복식류, 치관류 등이 출토되었다.
복식류는 직령, 단령, 철릭, 답호, 모자, 버선, 이불 등 23점으로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 초의 것으로 시신에 입힌 의복이긴 하나 대부분 관의 빈 공간을 채워주기 위해 넣은 옷들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치관류는 명정, 자리, 관곽, 칠성판, 만장 등 총 20점으로 무덤주인의 신분과 사회적 성향, 특징을 보여주어 사료적가치가 매우 크다.
이 출토유물들은 무덤 주인의 신분을 확실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태도 매우 양호하여 복식사와 시대고증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십신사지 석불(十信寺址 石佛)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십신사지 석불이다. 머리에서 대좌까지 모두 화강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조각 수법이 고졸한 편이다. 논산 관촉사의 미륵불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으로 고려시대 석불의 하나로 고려시대 지방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민머리에는 구멍이 있어 보관을 썼던 것으로 보이며 타원형의 평판적인 얼굴에서는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 느껴진다. 돌기둥의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얼굴 너비와 거의 같은 너비로 어깨를 만들어 신체는 위축된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손은 가슴 쪽으로 들어 보주(寶珠)같은 것을 쥐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대어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얼굴에 비해 경직된 모습이고 기법도 떨어져 보인다. 대좌에는 연꽃무늬와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는데 역시 딱딱한 모습이다.

십신사지 석비(十信寺址 石碑)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십신사지 석비이다. 비문에 정사년(丁巳年)이라는 간지 등으로 보아 세종 19년(1437)에 이 비를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거북받침의 벌집모양의 육각형 안에 ‘王'자를 새겨 놓았다. 비몸에는 앞면 윗부분에 범자(梵字)를 새긴 후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새겼는데 이 때문에 ‘범자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문에는 질병을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황해도 해주와 평안북도 용천에 있는 비와 함께 몇 안되는 범자비로서 그 가치가 높다.

광주 운암서원 해광집목판 (光州 雲巖書院 海狂集木板)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1호인 『해광집』 목판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한 해광 송제민(1549~160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이다. 『해광집』은 처음 조선 후기(1783년(정조 7)) 간행(초간본)했다가 근대(1933년)에 중간하였다. 현재의 목판은 초간본(46매)과 중간본(8매)을 합해 전체 54매로 완질이 보존되어 있다. 『해광집』은 조선시대 역사인물의 활동, 임란기의 활동, 사후 추숭 활동과 조선 후기 인쇄기술과 출판문화 등을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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