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민속실
전라도(全羅道)는 고려 현종 때인 1018년 행정구역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후, 천년이 넘도록 사용하고 있다. 전라도는 금강의 남쪽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 ‘호남’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전라도가 위치한 남쪽이란 의미를 강조할 때는 ‘남도’라 표현하기도 한다. 남도민속실에서는 생활문화를 통해 전라도의 자연과 그 속에 깃들어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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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자연
남도라는 말에는 따뜻함이 담겨 있다. 이 따뜻함은 남도가 한반도의 남쪽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도는 너른 바다와 맞닿아 있는데, 이 바다는 멀리 필리핀에서 올라온 해류의 영향으로 수온이 높고 그 덕분에 남도는 연중 포근하다. 바다를 품은 남도에서는 봄이 빨리 오고 여름이 긴 까닭에, 넓고 시원한 마룻방을 가진 집을 지었다. 반면 겨울은 더디게 온다. 지금도 남도는 서울보다 보름 늦게 김장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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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가
“함평 천지 늙은 몸이”로 시작되는 단가로, 소리꾼마다 가사가 조금씩 다르지만 조신시대 전라도 50여 고을의 이름이 등장한다. 원래의 작자와 창작 시기는 알 수 없고 신재효(申在孝)가 정리한 사본과 몇 종류의 이본이 전해지고 있다. 내용은 호남지방 여러 지명을 통해 지방의 특색과 풍경 등을 담고 있다.
남도의 농업
남도 사람들에게 농사는 생명을 지키는 일과 같았다. 파종에서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농가의 일상은 사계절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따비와 쟁기를 이용한 갈이에서부터 시작된 봄 농사는 물과의 전쟁인 모내기를 후, 본격적으로 호미를 이용한 김매기로 이어진다. 가을걷이는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는 만큼 중요한 일정이었다. 낫으로 수확한 벼는 홀태나 개상을 사용한 탈곡과정을 거쳐 디딜방아나 매통 등으로 도정한 후 저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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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싸움 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
고싸움놀이는 정월대보름 무렵 전남의 여러 지역에서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하는 마을 단위 놀이다. 광주 칠석동에서는 동부, 서부로 편을 갈라 고싸움을 하는데 동부는 남성, 서부는 여성을 상징하며 이 결과를 가지고 한 해의 농사 풍흉을 점쳤다. 여성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믿음에서 서부의 고를 크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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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뿌리다
19세기 우리나라에서는 볍씨 1말을 심어 파종량의 100배에 달하는 수확량을 거두는 논을 오출답(五出畓)이라고 했다. 심지어 장흥과 보성에서는 천배의 수확량을 올린 논에 대한 기록이 있었으나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20세기 초엽까지 쌀을 기준으로 수확량은 20~30배가 고작이었다. 현재는 80배 정도의 양을 수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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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농사
농업용수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못한 전근대사회에서 모내기는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다. 대개 마을사람들이 품앗이를 통해 모를 심었다. 강도 높은 집약적 노동 탓에 효율을 높이기 위한 농요가 발달하였는데, 우리 지역에는 영산강 상류를 중심으로 용전들노래(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2호)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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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와 농악
모내기와 김매기는 한여름까지 집약적으로 이뤄진다. 이 때문에 마을단위로 20~50명 정도가 두레를 결성하여 노동의 효율을 높였다. 해마다 김매기가 마무리되는 음력 7월, 두레꾼들은 호미씻이를 마무리로 해단하였다. 신명나는 농악이 어울려 농사의 수고를 위로했는데, 우리 지역은 호남우도농악에 속한 광산농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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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와 도구
봄 농사는 갈이에서부터 시작한다. 인류 최초의 농구(農具)를 따비로 보는 이유다. 여기서 발전한 것이 쟁기로 전라도에서는 호리쟁기질을 했다. 모내기 후, 호미를 이용한 본격적인 김매기에 돌입한다. 낫으로 수확한 벼는 홀태나 개상을 사용한 탈곡과정을 거쳐 디딜방아와 매통 등으로 도정하여 보관하였다.
남도의 집
우리 지역은 비교적 온난한 기후환경 때문에 통풍이 잘 되는 일자(一字)형의 가옥구조에 마루를 놓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온난한 기후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이가 심하게 난다. 이와 같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전라도의 집에는 마루와 온돌방이 공존했다.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마루에서,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에서 생활하며 뚜렷한 사계절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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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사랑방은 남성 중심의 공간으로 안방과는 분리되었다. 남성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고, 활발한 교우관계를 이어가며 사회적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했다. 사랑방에는 학문과 사색을 위한 가구를 놓았는데, 탁자, 책상, 경상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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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
우리지역의 따뜻한 자연환경은 가옥구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청이다. 대청의 앞문을 들어 서까래의 걸쇠에 걸면 보다 개방적인 구조로 이용할 수 있었고, 구들이 아닌 우물마루가 깔린 대청은 시원한 여름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대청에는 쌀뒤주, 안반, 석작 등 자주 쓰는 살림살이 등을 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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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부엌은 음식조리와 동시에 난방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부뚜막 아궁이는 취사와 난방 모두를 가능케 했다. 부엌의 한쪽에는 찬장과 살강을 설치하여 그릇 등을 보관하였고, 개수통과 시렁을 놓아 원활한 부엌살림을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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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안방은 집주인의 아내 또는 집안의 가장 큰 여성어른이 거처하는 곳으로 비교적 폐쇄적인 위치에 자리 잡았다. 전라도에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며느리가 안방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 화려함보다 기품과 검소함이 중시되는 살림살이에서 대소사를 관장했던 여성의 분주한 삶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도의 어업
전라도 해안선의 길이는 7,300㎞로 한반도 전체 해안선의 절반을 넘는다. 다도해(多島海)라는 명칭에 걸맞게 2,000여 개의 섬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섬 지역을 중심으로 예로부터 자염(소금)생산이 활발했고, 이는 전라도 맛의 근원이 되었다. 하지만 남도 사람들에게 바다는 마냥 풍성함을 주지 않았다. 어업은 매우 고된 일이었고 큰 위험이 뒤따랐다. 출어(出漁)에 앞서 생명의 안전과 풍어를 위한 의례를 잊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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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망배
뜰망배는 배꼬리에 지렛대를 세우고 그 끝에 그물을 달아매 고기를 잡던 배다. 고기를 잡기 위해 지렛대를 기울여 그물을 물에 잠기게 해서 물고기를 가뒀다가 지렛대를 높여 그물을 들어올렸다. 지렛대가 활처럼 휘었다고 해서 궁선(弓船) 또는 ‘활배’라고도 불렀다. 이 배는 1970년대까지 장흥군에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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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어업
전통사회에서 강은 관개용수원뿐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기능하였다. 강은 곡물, 목재와 같은 무겁고 부피가 나가는 화물의 수송로였는데, 섬진강에서는 수송에 떼배를 이용하였다. 전라도는 영산강, 섬진강, 탐진강을 끼고 있어 어업공간으로도 역할을 했는데 투망, 작살 등의 도구를 이용하는 민물고기 잡이가 성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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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자염과 천일염
전라도에서 소금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생산했는데, 바닷물을 끓여 만든 ‘자염’과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천일염’이다. 전라도에서는 광복 전까지 근근이 자염이 생산되다가 이후부터 천일염을 생산해 현재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양을 기록하고 있다.
남도의 시장
1470년 전라도 무안 땅에서는 지방 최초로 장이 열렸다. 가뭄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지역민을 위해 전라관찰사 고대필(高台弼)과 나주목사 이영견(李永肩)은 시장개설을 허용하여 곡식과 생필품의 교환을 도왔다. 과거 봇짐장수에 의존하던 상거래 방식과 비교하면 큰 변화였다. 장의 개설은 해마다 늘었다.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18세기 후반 전라도에서는 56개 고을 중 53개의 고을에서 장이 열려 경상도와 함께 장시 밀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온다. 광주에는 읍내에 있던 큰 장과 작은 장을 비롯해 서창장(西倉場), 대치장(大峙場), 신장(新場), 및 선암장(仙巖場)까지 총 6개의 장이 있었다. 거래 품목으로는 쌀을 비롯한 곡물, 면화 순으로 그 비중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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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와 명태
조선시대 전라도 장터에는 목화와 무명베가 넘쳤다. 전라도 목화와 무명베는 경상도를 거쳐 함경도로 갔고, 같은 길을 되밟아 함경도의 명태가 전라도로 들어왔다. 지역에서 나지 않은 명태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교환경제 덕분이었다. 교역망은 국내로 한정되지 않고 일본에서 은과 구리를, 중국에서 한약재와 염료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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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풍경
시장은 경제적 교환의 공간이자 정치・사회・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세상 돌아가는 제반 사정을 교환했다. 관(官)에서도 시장은 새로운 법령이나 행정사항을 전달하고, 민심 파악에 적격인 공간이었다. 새로 튼 난장은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비일상적인 경험으로 일상의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남도의 예술
조상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활용품에도 예술성을 불어넣었는데, 이것을 공예라고 하였다. 공예는 생활용품을 멋스럽게 만든다는 소박한 의미를 지녔다.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직물과 가구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한 공예는 각 지방마다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여러 가지 공예품들이 있는데, 전라도 지방은 지역의 특산물인 대나무 등을 활용하여 부채와 채상, 낙죽 등 대나무 공예품을 시작으로 나무결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겸비한 곡성장, 영광반닫이, 나주반 등이 골고루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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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김해김씨가 상여(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4호)
상여는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안내하고, 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상례에서 사용된다. 조선 후기부터 웅장하고 화려하게 제작되었는데, 강진김해김씨가 상여에서도 이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긴밀히 연결되었다는 전통 생사관을 반영한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의례를 더욱 숭고하고 엄숙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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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공예
가뭄과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지만 수확 전 서리에 취약한 목화의 생장조건은 광주・전남에 목화가 단단히 뿌리내린 배경이었다. 비교적 풍부한 생산량으로 이 지역에서는 당시 유행하는 복식문화를 빠르게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20세기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활발하게 전승된 쪽물염색도 의생활의 묘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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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공예
따뜻한 기후에 잘 자라는 대나무의 속성에 전라도에서는 대나무공예가 발달했다. 대를 가늘게 떠내 색을 들이고 비단을 짜듯 엮는 채상(彩箱)은 그중 으뜸이다. 또한 인두로 대껍질을 지져 문양을 넣는 낙죽(烙竹)은 대나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켰다. 전라도 전역에서 대나무 공예품이 생산되었지만, 단연 담양의 명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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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공예
전라도 연안의 소나무는 그 규모와 질로 높은 평판을 얻어왔다. 지역 목공예의 진면목은 바로 이러한 나무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최소한의 금구장식(金具裝飾)으로 나무 그대로의 소박한 멋을 드러내고, 독특한 나무결의 아름다움을 살린 경우가 많았다. 장(欌)은 나주・화순, 반닫이는 고흥・영광, 소반은 나주반을 최상품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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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는 읽는 그림이다.
민화에는 기교가 없다. 높은 예술성과 창의력을 보여줄 목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건강・행운・출세 등 세속적인 바람을 담아 집안을 치장할 목적으로 그린 실용성이 강한 그림이다. 그러나 민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고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까닭에 민화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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