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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비주얼

우리 조상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공간

광주광역시 역사민속박물관

광주근대역사실

광주는 무진주(武珍州)라는 이름으로 역사상 처음 등장한 백제 동성왕 때인 498년부터 이후 1500년 동안 연면히 역사를 이어왔다. 이후 무진(茂珍), 해양(海陽), 광산(光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광주는 한국 역사의 격동기에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방향타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그동안 광주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공간이 없어 시민들의 오랜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전시실에서는 이런 시민들의 바람을 담아 조선시대ㆍ일제강점기ㆍ광복 후의 역사를 광주읍성ㆍ충장로ㆍ금남로 등 세 공간으로 나눠 소개한다.

주요 전시
광주근대역사실 주요전시 사진1 광주근대역사실 주요전시 사진2 광주근대역사실 주요전시 사진3

광주읍성 : 조선시대 광주

광주읍성은 조선시대 광주 중심부를 에워싼 성이었다. 이 읍성 안팎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20세기 이후 광주역사의 중심공간이었다. 비록 20세기 초엽 일제에 의해 파괴됐지만 광주의 다사다난하고도 빛나는 기억들이 응집된 공간임을 기억하고자 광주에서는 처음으로 읍성 모형을 제작, 설치했다.

주요 전시
  • 광주읍성 성벽 전시사진

    광주읍성 성벽

    광주읍성은 고려 말엽(14세기) 지금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 지역에 오각형 모양으로 축조된 성으로, 1900~1910년대에 허물어졌다. 둘레는 2,500m, 높이는 3m 정도였다. 성벽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내부면적은 축구장 40개가 들어갈 만한 넓이(약 33만㎡)였다.

  • 절양루 전시사진

    절양루

    절양루는 충장로5가 끝에 있었다. 광주와 한양(북쪽)을 잇는 문이란 뜻으로 ‘공북루’ 또는 ‘누문’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의로운 광주역사의 출발점이다. 임진왜란 때 고종후의 의병부대가 이곳에서 진주성으로 향했고, 병자호란 때는 유평의 의병부대가 이곳에 모여 남한산성으로 출발했다.

  • 광주 관아와 사또 전시사진

    광주 관아와 사또

    관아는 지금의 지방 관공서에 해당하며 동헌(東軒)이라고도 불렀다. 관아의 최고 수장은 사또였다. 사또는 오늘날의 시장·교육감·판사·경찰서장·세무서장 등이 나눠서 할 일을 혼자 처리했다. 조선시대 광주 인구가 몇 만 명 정도로 적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광주에는 약 200명의 사또가 거쳐 갔다.

  • 1798년 과거 시험장, 광주 객사 전시사진

    1798년 과거 시험장, 광주 객사

    조선시대에는 시험 감독관을 지방에 보내 과거시험을 열기도 했는데 시험장소로 자주 사용된 곳이 객사였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곳으로 시험장 출입통제가 가능하여 엄숙한 분위기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1798년 정조의 특별지시로 치른 과거시험도 객사인 광산관(光山館)의 앞뜰에서 치러졌다.

충장로 : 일제강점기 광주

충장로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600여 년의 세월을 품은 길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에 관아로 통하는 도로였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상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 길은 청년ㆍ학생 들이 어우러지는 공간이자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때처럼 독립과 정의를 부르짖던 장소였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부각, 선양하고자 이번 전시에 일제강점기 충장로를 재현했다. 당시 청년운동의 산실인 흥학관, 학생독립운동의 현장인 광주역 등을 통해 광주 항일운동의 기상을 되짚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요 전시
  • 한말 의병 전시사진

    한말 의병

    1895년 시작된 전라도의 한말의병은 1908년 이후 눈에 띄게 커졌다. 그들은 일본군에 비해 구식 무기를 가졌지만 지형에 밝다는 이점과 주민들의 도움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1909년 전라도를 대상으로 한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냈고, 항일운동은 1919년 3·1운동 때까지 잠시 숨을 골라야만 했다.

  • 관찰부에서 도청으로 전시사진

    관찰부에서 도청으로

    1896년 전남과 전북이 분리되고, 관찰부가 생기면서 광주는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관찰부는 광주관아 건물을 사용했다. 일제강점 이후, 관찰부는 전남도로 바꿨고, 광산동 13번지로 옮겼다. 초기에는 목조건물이었다가 1930년 2층 벽돌 건물로 신축했고, 미군정에는 건물을 흰색 페인트를 칠했다가, 1970년대 3층 건물로 증축했다.

  • 광주우편국 전시사진

    광주우편국

    광주우편국이 현재 충장로 우체국 자리에 생긴 것은 1913년이다. 이 자리는 원래 조선시대에 활터이자 사교공간인 희경루와 관덕정이란 건물이 있었다. 우체국 일대는 운명처럼 사람들의 발걸음을 모으는 장소였던 것 같다. 1970년대 우체국 앞 네거리를 광주사람들은 약속장소로 애용했고 그때부터 이곳을 ‘우다방’이라 불렀다.

  • 광주역 전시사진

    광주역

    1922년 송정리역과 광주 시내를 잇는 철도가 놓이고, 대인동 동부소방서 자리에 광주역이 생기면서 광주는 교육 중심지로 성장했다. 반면 철도는 학생들의 항일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도 했다. 통학 열차와 정거장에서 한국과 일본 학생들은 자주 충돌을 빚었고 결국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 광주극장 전시사진

    광주극장

    광주극장은 충장로5가에서 김준실과 최선진으로 이어지는 우여곡절 속에 1935년 문을 열었다. 광주극장은 중요한 집회와 공연이 열리던 단순한 영화상영관 이상의 장소였다. 최근 복합상영관 증가로 운영에 어려움이 있지만 후손들의 꿋꿋한 극장 경영과 광주 유일 단관을 찾는 적잖은 발걸음에 광주극장의 영사기는 오늘도 돌아간다.

  • 광주학생독립운동 전시사진

    광주학생독립운동

    1929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독립운동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전국 수많은 학생들이 광주운동에 자극받아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시위에 나섰기 때문이다. 광주가 왜 이러한 항일운동의 근원지가 됐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면면이 이어온,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광주지역 사람들의 열정 등 여러 복합적인 원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 흥학관 전시사진

    흥학관

    세칭 ‘구시청사거리’ 근처에 있었던 건물로 1920년대 세워져 일제강점기 광주 청년 및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광복 후 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다 시청이 계림동으로 이전할 무렵 헐렸다. 재현된 흥학관에서는 건물의 역사적 의의를 부각하고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제로 1950년대 제작된 영화 <이름 없는 별들>을 상영하고 있다.

금남로 : 해방 후 광주

누구나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면 옛 전남도청과 함께 금남로를 생각할 것이다. 금남로는 광복 후 광주의 급속한 도시화와 함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슬픔, 승리의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 전시공간 ‘금남로’는 이런 격동의 거리에 담긴 역사를 차분하게 성찰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주요 전시
  • 금남로, 탄생과 변화 전시사진

    금남로, 탄생과 변화

    금남로는 1920년대에 길을 닦기 시작해 1930년대에 완성됐다. 이곳은 처음부터 권력의 거리였다. 전남도청과 일본군 헌병대, 법원까지 모두 식민지배 권력을 상징하는 기관이 들어섰다. 광복 후에도 같았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비로소 지배 권력이 아닌,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거리가 됐다.

  • 광주, 도시화의 여정 전시사진

    광주, 도시화의 여정

    광복을 맞던 해, 광주인구는 8만 명, 이후 여순사건과 6·25전쟁, 1960~70년대 호남을 휩쓴 가뭄과 가난을 피해 많은 이들이 광주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교육과 일자리를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광주인구는 1960~70년대에 30만에서 70만으로 늘었다. 역사상 광주인구가 이처럼 빠르게 늘어난 시기는 없었다.

  • 주택난과 아파트 전시사진

    주택난과 아파트

    1960년대 7만 세대가 살던 광주에 집은 5만 채에 불과했다. 4만 채는 기와집, 1만 채는 초가집이었다. 1966년 처음 등장한 아파트는 사람이 살 집이 아니라며 홀대받았다. 공동우물을 사용했고, 화장실도 몇 집이 함께 써야 했다.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1970년대부터다. 오늘날 광주사람 10명 중 6명은 아파트에 산다.

  • 수돗물과 도청 앞 분수대 전시사진

    수돗물과 도청 앞 분수대

    광주에서 수돗물 공급은 1920년 증심사 계곡에 댐을 쌓으며 시작했다. 그런데 수돗물은 공급과 동시에 부족사태를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까지 광주사람 10명 중 절반 정도만 수돗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1971년 동복댐에 완성되며 상황은 크게 나아졌다. 이를 기념해 세운 것이 도청 앞 분수대이다.

  • 도시와 자동차 전시사진

    도시와 자동차

    1960년대에는 걸어서 1시간이면 광주시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당시 광주에는 1,000대의 자동차가 있었다(400명당 1대), 오늘날 광주는 더 이상 걸어 다니는 도시가 아니다. 1980년대 제1순환도로의 내부면적만 10㎢였고, 당시 광주에는 6만대의 차가 있었다.(15명당 1대). 현재 광주에는 60만대의 자동차가 움직인다(2명당 1대)

  •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 전시사진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

    6~70년대 시대는 빠르게 변했고, 사람들은 이를 진보라 불렀다. 그러나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1971년 광산구 산월동 출신 김경숙은 서울에서 ‘공순이(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노동환경은 열악했고, 회사는 노사분규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1979년 격분한 노동자들이 야당 당사 점거시위를 했고, 경찰의 강제진압 후 김경숙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녀 나이 21살이었다.

  • 도시화의 그늘 전시사진

    도시화의 그늘

    광주의 도시화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 것이 경양방죽 매립과 태봉산 철거다. 경양방죽은 계림동에 위치한 면적 20만㎡의 인공 호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부가 매립돼 6만㎡로 줄어들었고, 1960년대 주택지 개발을 위해 남은 호수를 매립했다. 이 호수의 최종 매립에는 태봉산 철거 때 나온 흙이 사용됐다.

  • 금남로 단풍나무 그루터기 전시사진

    금남로 단풍나무 그루터기

    살아있는 동안에 이 나무는 금남로 4가에 있었다. 나무의 나이는 350년. 그런데 나무의 시간은 1960년대에 멈춰 섰다. 금남로 확장 직전, 차량통행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베어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의 기술을 사용해 이 나무의 그루터기에 부할의 메시지를 담아보려 했다. 그렇다고 생명 그 자체는 멈춰선 시간에서 헤쳐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다시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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