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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고경명선생

6천명의 의병을 이끈 고경명 선생 1592년 임진왜란(선조25년)

제봉 고경명 선생 영정

선생은 동래부사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학업에 전념하고 있던 중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의병궐기

1592년 5월 3일

전라순찰사와 김천일에게 격문을 보내 기병하여 줄것을 요청하고

1592년 5월 3일

경성 함락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광주부근의 흩어진 관군을 모아 두 아들인 종후,인후로 하여름 군졸을 인솔케 하여 수원에서 항전하는 광주 목사 정윤우와 합세하게 하였으며

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의 식량공급은 박광옥에게 맡기고 종사관에는 유팽로 안영,양대복을 모량유사에는 최상중,양사형,양희적 등을 임명하여 서로 백마피를 마시며 맹세한다음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여 북상하는 한편 도내 별읍에 격문을 보내었다. 출사표를 작성하여 양산숙 등과 곽현으로 하여금 의주에 피난중인 선조에게 알리니 선조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공조참의지제교 겸 초토사로 임명하였다. 이날 북진중 전북 태인에서 장남 종후로 하여금 격문을 휴대하고 전북 금구에서 병기와 양곡을 수집케하고 또 제주목사 양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전마를 청구하였으며

1592년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하여 격문을 각도 열읍에 보내어 위국충절하라고 격려하였다. 한편 차남 인후에게 휘하용사 수백명을 인솔케하고 무주, 진안 요로에 복병시켜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구축케 하였다.

1592년 6월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이진하여 임피에서 병량을 수집하던 종후와, 문주에서 복병하던 인후가 와서 같이 만났고, 해남, 강진 양 군에 격문을 발송하였다.

1592년 6월 24일

마상에서 격문을 작성하여 호서, 경기, 해서, 평안 등 각도열읍에 보냈다.

1592년 6월 27일

진군하여 은진에 유진하였다. 당시에 황윤, 영동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탈취하고 완산을 경유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군이 북상하면 왜적이 허세를 이용하여 호남을 탈취할터이니 호남은 곡창지대로 국가의 보고이므로 절대 방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호남으로 회군키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592년 7월 1일

은진으로부터 연산에 유진하였다.

1592년 7월 5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서한을 보내어 7월 10일 형강을 건너 합세하여 금산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기로 상약하였다. 그러나 조헌 선생이 그날 형강을 넘어오지 못했다.

1592년 7월 6일

연산에 유진하고 있는 중 선생의 격문을 보는이 마다 의기에 감동하여 전야의 농부들과 서당의 학도들이 자진 입대하고 관군들도 의병진에 전대하니 그 총수는 7천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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